글터 졸업생들을 위한 공간,

(2017-06-29 20:45:02)

이재훈

00 이치우 - 모량역

모량역

00 이치우(청춘을 새기는 시간)

내가 그쪽으로 가겠다고 하는데도
그녀는 굳이 열차를 타고 우리 동네까지 오곤 했다.

그녀가 오면
내가 다닌 초등학교 운동장과
마을 앞 고분 사잇길을 함께 걸으며 이야기했는데
조곤조곤 학교 등나무도 같이 속삭였고
옛 무덤들은 꿈을 꾸려 자주 눈을 감았다.

그녀가 오는 날
혹 기차가 먼저 도착할까 마을에서
역까지 뻗어있는 들 한가운데 외줄기 길을 한달음에 뛰곤 했다

역으로 가는 길
나무 전신주와 푸른 벼
멀리 보이는 간이역 박공지붕
한달음에 뛰기에는 아득한 그 적막함에 나는
달리는 동안 가끔 현기증을 느꼈다

어느날,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소식이 없었고
나를 보러 더 이상 우리 마을에도 오지 않았다

때마침 기차도 서지 않고 무심히 마을역을 스쳐 지나갔으며
퍠쇄된 역 입구
자물쇠가 걸린 미닫이문 앞에서 나는
무작정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역 앞 마당 벚나무가 몇 번인가 피고 졌다
어느 순간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만 꽃잎들은
바람에 정신없이 흩날렸다

멈추지 않고 역을 지나치는 기차와
녹슨 자물쇠로 잠겨있는 문
오지 않는 그녀
한순간 몇 번이고 피고 지는 꽃잎 속, 마당 귀퉁이
희미한 벚꽃나무의 계절
자리에 일어나서도 나는
멍하게 앉아 눈만 꿈뻑였다

기차가 올 시간
쓸쓸하고 아득한 길 자박자박
멀리서 돌아오고 있을 봄
아마
다음 봄에도 흐드러지게 벚꽃나무와
바람이 불면 또 먼 곳까지 날려가야할 꽃잎들을 맞으러

기차가 멈추고
드르르륵
역 입구
미닫이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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