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많이 내린 날, 술집에서 만난 후배. 흩날리는 비에 머리칼이 젖어서 내개 고백을 한다. "사랑에 빠졌다"고. 어쩌면 좋으냐고. 함께 만난 이들은 모두 얼굴이 어둡다. 그는 아이들이 있는 가장이다. 그런데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고 한다. 다들 반옥타브쯤 낮아진 마음들을 뒤로 하고 열에 들뜬 얼굴로 그녀석은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사랑하는 그 사람을 만나려 가야 한다며.
문득 내가 사랑이라는 열병을 앓았던 젊은 시절, 지금은 내게서 멀어진 잃어버린 시간이 생각난다. 사랑의 열정으로 타오르는 피는 내 안에 불이 되었다. 그리고 그 불꽃이 내 안에 퍼져 마치 피기 직전의 말간 장미꽃망울처럼 그 붉은 불꽃의 빛깔이 내 뺨에도 늘 비추곤 헸다. 그 불길이 입술을 통해 밖으로 나오면 입술은 붉은 장미의 꽃받침처럼 살며서 열리고 한 송이 타오르는 장미꽃 같던 뜨거운 사랑의 속삭임과 맹세가 흘러 나왔다. 그야말로 장미빛 인생이 아니라 "삶이 활짝핀 붉은 장미"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어디 기쁨만이 있었으랴. 서로의 손을 덥석 잡으면, 입술이라도 살포시 맞닿으면 그대로 타오르는 장미 덩굴이 되던 연인들에게 언제나 이별의 시간은 찾아오고, 오해와 질투 속에서 사랑이 회색으로 사그라져 그 불타는 장미가 시들어버리면, 아무리 술을 마셔도 아픔이 가시지 않는 찢어진 마음을 우리에게 주던 것이 또 사랑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별임을 알면서도 술 취한 채 함께 걸었던 길 어귀에서 서성거리는 나를 발견하는 11월의 서늘한 저녁같은 슬픔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덧 살다 보니 그 모든 시간들은 감정의 과잉이며 한 때의 치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아무런 감정의 동요나 기복도 없이 붉게 타오르는 사랑이나 시커먼 절망과 상실의 슬픔도 없이 우리는 이리도 통속적이고 덤덤하게 늙어가고 있다. 아니 어떤 경우 한여름 땡볕 아래 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난감한 자세의 형틀에 갇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은 삶을 사는지도 모른다. 결혼이라는 새장이 형틀이 되고, 바위가 되어 끝없이 그 바위를 올려 부치는 숨찬 언덕배기를 매일매일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다.
내 친구들은 사랑을 시작한다고 몹시도 들뜨고 불안정해 보이던 그 녀석에게 제발 돌아가라고, 정신을 차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40여년의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 40여년의 삶을 더 살아야 하는 이 시점에 앞으로의 삶의 "사랑없는 회색빛 책장"만 가득한 우울한 책이라면 나는 더 살아갈 힘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을 전제로 사랑을 찾으라고 말했다. 다들 나를 나무라고 다시 그를 만류한다. 하지만 이 숨막힐듯한 습하고 더운 여름날 같은 우리 삶에도 불타오르는 장미꽃밭은 아닐지라도, 아담한 노란 덩굴장미라도, 아님 좁은 화단 한 구석을 수줍게 빛내는 연분홍 분꽃만한 사랑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가 싶다. 그래야 내가 인간이고, 내가 살아있다고 말할 행복이,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닐가........
영원히 철들지 않는 삶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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