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터 졸업생들을 위한 공간,

(2005-06-17 02:14:47)

모우

장마 2005

장마 2005

1.

흰 종이에 살아서 움직이는 것

그것은 내 생각 상념들 그리고

갖가지 소리들 아니 소음들

난 그것을 먹고 토한다

깊이 절망하기에는

난 조금 오래 산 듯하고

지금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나

참을 수 없는 슬픔도 없다 하니

내 삶은 그야말로

퍽퍽하고 먹기 힘든 말라빠진 빵 조각,

이제 독 안에 든 눈물도 다 말라버려

가물고 가물어 수없이 많은 틈들이 독 안에 도사리고 있다

갈라진 틈 사이로 분명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내 안에 담아둘 수 없는 고통만큼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

2.

그해 봄에도 어김없이 집 앞

목련나무는 하얗게 부푼 배를 보이며 임신을 했고

해산을 치뤘다

새 생명이 세상에 머리를 디밀었을 때

목련꽃잎은 땅에 미끄러져

검붉은 피를 쏟으며 하혈을 했지만

그해 여름까지 싱싱한 나뭇잎들은

비를 맞으며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끔은 인가를 기웃거리고

가끔은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멍청하게 하염없이 서 있는가 하면

한번쯤은 무겁게 들어 올린 채 움직이지 않는

팔을 내려놓고

어깨를 주물러 달라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녀는 무거운 짐으로 가득찬 삶을

온통 푸르고 푸른 잎들로 채워 놓고 있었다

3.

슬픔이 마르고

고통도 느낄 수 없으며

더 이상 절망감 따위는 없으며

오로지 농담과 하품과 권태와 무관심과 무기력,

한밤중에 본 우물 속 내 얼굴과

창가 목련나무는 서로 항상 마주 보고 있지만

서로 항상 다른 길로 가기로 약속한 듯하다

어떤 이의 나침반은 좌표가 없고

어떤 이의 집 시계는 고장이 났고

어떤 이의 서재에는 벌레만 우글거린다

그러나

어떤 이는 좌표 없이 흔들리는 나침반을 닦아 갈 곳을 일러주고

어떤 이는 고장 난 시계를 뜯어 쓸모 있는 물건을 만들고

어떤 이의 서재에는 벌레만 우글거리지만

그 벌레는 종이를 파먹고 사는 책벌레라

서재에서는 책 향기가 난다

나침반과 시계, 책들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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